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돌프 히틀러/생애 (문단 편집) == [[뮌헨 폭동]]과 수감생활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02-00344A%2C_M%C3%BCnchen%2C_nach_Hitler-Ludendorff_Prozess_retouched.jpg|width=100%]]}}}|| || 1924년의 히틀러. 히틀러 왼쪽의 인물이 [[에리히 루덴도르프]], 왼쪽에서 3번째가 [[빌헬름 프리크]]이다. 그 오른쪽은 [[헤르만 크리벨]]. || 패전 직후인 20년대 초, 배상금의 여파와 [[초인플레이션]]이 겹친 불황으로 인해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극우 및 극좌 세력의 무장 난동이 빈번했다. 이 시류를 타 히틀러는 1923년 11월 일명 '맥주홀 폭동'을 일으켜 화려한 반등을 꾀하게 된다.[* 맥주홀은 말 그대로 맥주를 파는 술집으로, 당시 독일에서 맥주홀은 종종 연설장 역할을 하기도 했기에 맥주홀에서 폭동이 시작된 것 또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 폭동은 [[베니토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당의 로마 진군에 영향을 받은 히틀러의 즉흥적인 결정이었으며, 사전 계획도 엉성했다. (쿠데타에 있어 필수 요소인) 군대의 확실한 지지 선언도 없었고, 세밀한 계획도 없었으며, 정작 바이에른의 주요 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 주(州) 총리와 야전군 사령관, 경찰총장을 맥주홀에서 잡아 놓고는 자신들에게 협력하겠다는 구두 약속 하나만 받고 히틀러가 잠시 다른 곳에 간 사이에 그냥 풀어주는 멍청한 짓까지 저질렀다. 이 무모한 폭동은 히틀러의 바로 옆에서 가두시위를 하던 측근이 진압군의 총탄에 맞아 죽는 등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물론 군대와 주 정부의 지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 바이에른은 우익 민족주의자들의 성지였고, 뮌헨은 그 심장노릇을 하고 있었다. 뮌헨 시장을 비롯한 정부인사들이 공공연하게 베를린과 바이마르 공화국을 '''[[빨갱이]]들의 왕국'''이라며 공격했고, 종종 바이에른이 베를린으로부터 독립될 것임을 암시하곤 했다. 나치를 비롯한 우익정당과 정치모임, 그리고 의용군들의 활동에 힘입어 이 지역의 반 공화국 정서는 언제 폭발해도 이상할 게 없을 상태였다. 더군다나, 맥주홀 폭동 이전에 뮌헨 시장과 방위군 그리고 루덴도르프는 히틀러와의 합의를 통해 바이에른에 민족주의 혁명을 선언하고 [[베를린]]으로 행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여기에 히틀러는 [[로마 진군|무솔리니처럼 합법적으로 인정된 쿠데타]]를 주장하여 주지사를 비롯한 주 정부의 주요 인사들에게 암묵적인 허가를 받을 계획이었고, 뮌헨 시장 이하 쿠데타의 협력자들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문제는 이들이 서로의 이해타산으로 이루어진 동맹이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뮌헨 시장은 사실 베를린의 전복보다는 베를린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했고[* 유대인과 극좌파들이 베를린과 바이마르 공화국을 장악했다고 생각했다.], 루덴도르프는 베를린 전복 후의 구 제정복고를 꿈꾸었으며, 히틀러는 베를린을 전복시킨 뒤에 [[민족주의]] 혁명국가를 세울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이 마치 경쟁하듯 뻗쳐나가게 되었다. 히틀러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누구보다 먼저 베를린에 입성해야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렸다. 그 와중에 뮌헨 시장을 비롯한 인사들과 방위군 인사들이 11월 8일 저녁에 맥주홀에서 선언을 한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고, 이들에게 혁명의 주도권을 뺏기는게 두려운 나머지 11월 10~19일 사이로 잡혀있던 쿠데타 계획을 아무 계획없이 11월 8일 당일로 당겨서 시작해버렸다. 이 과정에서 뮌헨 시장과 히틀러는 서로가 서로에게 약속을 깨뜨렸다고 소리질렀고, 뮌헨 시장은 홀에서 다시 시청으로 돌아간 뒤에 히틀러와의 공조는 없고 쿠데타도 없을 것이라고 선언해 버렸다. 결국 11월 8일, 히틀러와 극우 패거리들이 뷔르거브로이켈러(Bürgerbräukeller)의 맥주홀에 모인 뮌헨 고위인사들을 억류하고 자신들의 쿠데타에 강제로 합류시켰다.[* 이때 맥주홀에 있던 시민들이 나치당의 비합법적인 폭동에 분노해 “여기가 멕시코, 남아메리카냐?” 라며 비난하자, 괴링은 “우리덕에 공짜로 맥주를 얻었으니 만족하라”라고 응수, 들끓는 민심에 기름을 퍼부었다. 허나 이를 감지한 히틀러가 나타나 짧은 연설로 분위기를 극적으로 반전 시키는데 성공해 쿠데타의 주도권을 잡는다.] 하지만 같이 쿠데타를 이끌던 [[루덴도르프]]가 '''기껏잡은 뮌헨 고관들을 풀어주는 트롤링'''을 벌이고, 급조된 쿠데타 세력이 주요 병영과 경찰서, 그리고 통신망을 재빨리 장악하지 않은 시점에서 부터 폭망은 예정되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뒤늦게 상황파악을 한 히틀러는 뮌헨 중심가로 2,000명의 당원과 함께 요란한 가두행진을 시작했지만, 얼마 안가 경찰들에게 저지됐다. 얼마 후 총격이 시작되면서 난리가 벌어졌고, 히틀러와 어깨동무한 당원이 총에 맞아 철퍼덕 쓰러지면서 어깨 탈골상을 당했다. 완전히 멘탈이 나간 히틀러는 [[심영(야인시대)|혼란을 틈타서 샛길로 빤스런한 다음, 돌격대원 차에 탑승하고 줄행랑을 쳤다.]][* 참고로 같이 행진하던 [[헤르만 괴링|괴링]]은 고환에 총상을 맞는 심각한 부상을 당하고 약쟁이로 전락한다. 한편 루덴도르프는 아랑곳 않고 용감하게 행진을 이어가다 체포된다.] 이후 거지꼴로 후원자인 한프슈탱글 부부의 저택에 숨어서 덜덜떨었다. 사흘뒤인 11월 11일 5시 경에 경찰이 자신을 곧 잡으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모든 것이 끝났다”라며 아연실색 하고, 자신이 가진 [[리볼버]]를 가지고 자살시도를 하지만 부인이 제지해서 이는 촌극으로 끝나게 된다. 얼마 후 아돌프 히틀러는 잠옷 바람 +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으로 체포된다.[* 공교롭게도 이때 히틀러가 수감된 방은 원래 [[독일 혁명]] 당시 반란을 일으킨 [[쿠르트 아이스너]]를 살해한 암살범이 복역하고 있었다.]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수감된 히틀러는 처음에는 단식투쟁을 시도했다. 이는 정치적인 목적을 노리고 한 행위가 아니라 그저 모든것이 끝났다는 생각으로 자살시도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실패했고,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폐인이 된채로 병상에 누워있으면서 모든게 끝났고, 죽고 싶다고 끊임없이 되뇌는 것 밖에 없었다. 이후 히틀러가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한참 걸렸다고 한다. 맥주홀 폭동에서 보인 히틀러의 모습은 매우 한심하고 코미디 같지만, 훗날 히틀러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보이는 모습들을 예고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수 있다. 극단적인 감정 기복, 정세가 불리할 때 보이는 비이성적인 행동들, 그리고 몰락했다고 생각했을때 나타나는 극단적인 자괴파괴적인 행동들이 전부 이 사건에서 나타났고, 훗날 더 끔찍하게 반복된다. 맥주홀 폭동은 허술한 계획에서 시작되어 멍청하게 끝나버렸지만, 히틀러가 바이에른의 일개 지역 인사에서 독일 전역의 유명 인사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며 훗날 히틀러의 정치적 출세에 있어 큰 자산이 되었다. 우선 히틀러의 체포 이후 이루어진 (히틀러 외 5인에 대한 형량을 심판하는)[* 이때 같이 기소된 사람 중에는 1차대전 당시 독일의 실질적 독재자였던 루덴도르프가 있었는데, 그는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다만 그는 기소 자체를 굴욕적으로 느꼈으며 언플로 히틀러만 전국적 유명 인사가 되는 꼴과 이후 자신이 나치당의 대선 후보로 이용당하는 꼴을 두고 보다 못해 히틀러와 관계가 악화되며 갈라지게 된다.] 재판은 코미디나 다름없었다. 자신들의 봉기는 좌파들의 폭동과 달리 애국심의 발로였다는 히틀러의 주장에 방청객들은 물론 판사들마저 감동하면서 히틀러 '''선생님''' 소리를 들었다. 당시 재판관이었던 게오르크 나이트하르트는 "아니, 히틀러 선생 같은 애국자가 있다니!"라며 재판 일정의 2/3을 히틀러의 장광설에 할애하는 등 무제한적 변론을 보장해 주었다.[* 이후 히틀러는 정권을 잡은 뒤인 1933년 나이트하르트를 바이에른 대법원장으로 임명하고 1937년 그가 은퇴하자 자필 헌정사를 보내는 등 자신에게 베푼 특혜에 대해 확실히 보답해 주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옆 동네의 독재자]]가 그랬듯 히틀러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에겐 어떤 방식으로든 은혜를 갚아주곤 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히틀러의 이름은 전국의 신문지에 오르내리며 인지도가 오르게 되고, 그 결과 사회 불만 세력에게 있어 '이 문제 많은 체제를 끝장내 줄 지도자'라는 인식을 박아주게 된다.[* 이 사회 불만 세력 중 하나였던 [[요제프 괴벨스|라인란트의 어느 실업자]]는 전국적 명성을 얻은 히틀러의 추종자가 되어 나치에 입당하게 된다.] 여기에 반대파에게 있어 악명이 높아진 건 덤. 결과적으로 (많은 죄목이 누락된 판결문과 함께) 아돌프 히틀러는 금고 5년형을 선고받고 13개월 만에 특사로 풀려나게 된다.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의 법에 의거하면 그의 죄목은 최소 징역 15년형이었으나, 약식 재판소인 바이에른 인민재판소에서 해당 사건을 라이프치히 국가대법원으로 송고하지 않기 위해 대놓고 봐주는 짓을 저지른 결과였다.[* 의외로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라이프치히 재판소에서 재판받기를 희망했다. 자신의 쿠데타 계획에 처음에 찬동한 뮌헨 고관들을 같이 몰락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히틀러에 연루된 뮌헨 높으신 분들의 압력으로 인해 바이에른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히틀러가 수감된 란츠베르크 요새에서 그는 온갖 특혜를 누리며 유명 인사로 살았다. 히틀러의 어머니를 자처한 '여사님'들의 무제한 접견이 허용되었고 나치 추종자들은 충성심을 인정받고자 매일 얼굴도장을 찍으러 왔다. 팬들은 가구와 꽃으로 그의 감방을 장식했으며 간수들은 '애국자' 히틀러 '선생'에게 매우 공손하게 대했다.[* 심지어 [[나치식 경례|하일 히틀러]]라고 인사하는 교도관도 있었다(...)] 교도소 안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산책 및 운동을 할 권리도 부여되었고 타자기와 책상의 반입 또한 허용되었다. 교도소 측은 그의 옆방에 히틀러의 일편 단심 바라미 [[루돌프 헤스]]를 넣어주었고 헤스는 히틀러가 훗날 나치즘의 성경이 된 '[[나의 투쟁]]'을 구술하면 이를 받아적게 된다. 결국 히틀러는 수감되었지만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어서 오히려 그의 이름을 독일 국민에게 확실히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로 히틀러는 기기묘묘한 애국자로 입소문에 오르게 된다. 당시 식민지 상태의 조선땅 [[동아일보]]에도 이를 다룬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011210020920100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0-11-21&officeId=00020&pageNo=1&printNo=3554&publishType=00020|국적도 없는 애국자, 독일의 히틀러씨]][* 여기서 뿌라우나우는 [[브라우나우암인]], 빠바리아는 [[바이에른]]이고, 유야납은 [[빈(오스트리아)|빈]]의 중국식 음차.] 히틀러는 교도소에 수감되면서 건강검진도 같이 받았는데 여기서 오른쪽 고환이 '''잠복고환''' 즉 짝X알인 사실이 밝혀진다. 요제프 브룬슈타이너 당시 란츠베르크 교도소 의사가 쓴 히틀러의 검사기록에는 "아돌프 히틀러, 예술가이며 최근에는 저술가이다. 이 자는 매우 건강하다. 그러나 '''잠복고환'''이 오른쪽에 있다."라고 기록해 놨다.[[http://www.segye.com/content/html/2015/12/20/20151220001015.html|#]] [[http://m.yna.co.kr/kr/contents/?cid=AKR20151220065200082&source=flipboard|#]] 즉 사고나 부상으로 후천적 장애인이 된게 아니라 선천적으로 짝x알이였다. 그리고 이 사실은 살짝 와전되어서 히틀러가 1차 대전 때, 혹은 맥주홀 폭동 때 [[내가 고자라니|고환 한쪽이 날아갔다는 소문이 되어서]] 2차 대전때는 영국 같은 히틀러의 적들이 히틀러를 두고 짝X알로 두고두고 놀렸고, [[보기 대령 행진곡#s-2|노래로도 나왔다.]] 히틀러의 금욕적인 행동도 여기서 나온게 아닌가 하는 추정도 있다. 수감 6개월이 지난 후부터 석방 때까지 나치당 조직이 사실상 와해되었다고 판단한 주 정부에서는 검찰과 경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석방해 버리고 말았다. 정확한 출소일은 1924년 12월 20일. 이러한 주정부의 판단은 당시 바이에른 주가 상대적으로 좌파 진영의 세가 강한 베를린에 맞서는 보수 진영의 중심지가 된 당시의 정세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바이에른 주의 보수적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언제까지 이런 애국자를 사소한 법 위반으로 가둬 둘 거냐"라는 질타가 상당했다. 역사가들은 이 때 히틀러가 반역죄에 상응하는 형량을 제대로 살았다면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는 예측을 하곤 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itler_and_Mussolini_June_1940.jpg|width=100%]]}}}|| || 무솔리니와 같은 차를 탄 히틀러 || 히틀러는 출소 이후 정치노선을 바꾼다. 원래 히틀러는 롤 모델로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를 선택했고, [[로마 진군|무솔리니가 했던 것처럼]] 쿠데타로 정권 탈취를 시도한 게 [[뮌헨 폭동]]이었다. 그러나 무솔리니와 달리 히틀러는 실패했고 이후 무솔리니식의 폭력적인 쿠데타보다는 합법적으로 권력을 거머쥐는 의회주의 노선을 채택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합법일 뿐, 뒤로는 온갖 정치공작, [[SA|돌격대]]를 이용한 폭력과 각종 비리를 일삼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소 직후 히틀러와 나치당은 와해 위기에 몰릴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히틀러가 체포되면서 당의 중심이 사라져서 극우 진영이 온갖 내분에 휩싸이고, 이들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던 전후의 경제적 비관주의가 독일의 경제 회복과 함께 점차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틀러 수감 시절 극우진영의 극심한 내분과 부진은 극우파들 사이에서 "히틀러가 아니면 정권을 잡을 수 없다." 는 일종의 신화적 관념을 심어주게 되었으며 보수 진영에서 히틀러의 입지가 크게 올라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던 와중 히틀러와 나치당에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으니, [[세계 대공황]]이 터져버린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